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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노명우 지음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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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TV를 끌 줄 아는 자, TV의 주인이 된다
입력: 2008년 10월 31일 17:30:40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노명우 | 프로네시스

텔레비전은 모든 사람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대통령은 물론, 그에 반대하는 시위대도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되는 올림픽 경기를 보며 똑같이 환호한다. 텔레비전이 켜지는 순간 사람들의 대화는 끊기고 모두가 ‘실어증’에 걸린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을 권리’는 어불성설이다. 하나의 미디어가 사회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선택권은 없다. 유일하게 남는 방법은 ‘선택’이 아니라 ‘적응’이다.

스스로를 ‘텔레비전 키드’라고 말하는 저자(아주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텔레비전을 버리자’는 선동 대신 ‘또 하나의 가족’이 된 텔레비전에 대한 ‘낯설게 보기’를 시도한다.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은 ‘온(ON)’ ‘볼륨’ ‘채널’ ‘오프(OFF)’ 등 네 가지 버튼을 키워드로 텔레비전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성찰한 책이다.

작가 현진의 <내러티브가 있는 텔레비전>(2008, 디지털프린트).
특히 ‘볼륨’과 ‘채널’의 사회학적 의미 분석에 공을 들였다. ‘볼륨’ 버튼으로는 텔레비전 소리의 양을 조절할 수 있지만 질을 통제할 순 없다. 저자는 “양을 통제할 뿐인 볼륨 버튼은 ‘볼륨(양)의 경제학’인 포드주의를 닮았다”고 지적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포드주의적 방식은 텔레비전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대량생산된 상품의 대량소비를 통해 이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성찰’보다는 ‘속도’가 우선이다. 텔레비전이 시청률에 목을 매는 이유도 프로그램의 대량소비가 시청률로 측정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텔레비전을 켜는 순간 시청자들은 알게 모르게 포드주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의 재택근무자로 고용되는 셈”이라는 독일의 미디어 이론가 귄터 안더스의 말을 인용한다.

부르주아 공론장의 촉매제로 탄생한 신문이 정치적인 것과 달리 포드주의적 방식으로 탄생한 텔레비전은 ‘탈이념적’이다. 거대한 돈이 매일매일 투입되어야 유지되는 만큼 다른 어떤 미디어보다 경제적 이윤에 민감하다. 저자는 “텔레비전은 신자유주의 예고편과 유사하다”고까지 말한다.

책은 우리가 ‘볼륨’이나 ‘채널’ 버튼을 통해 텔레비전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발신과 수신의 비대칭적 의사소통 형식”인 텔레비전은 시청자의 무능력을 전제로 한다. 시청자들간의 대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시청자들은 ‘채널’을 통해 텔레비전이 구축한 세계 속에 편입되지만 자신을 외부로 드러낼 수 있는 ‘기능 버튼’을 텔레비전에서 찾을 수 없기에 정치적으로 무력하다. 결국 잃어버린 대화 능력의 복원은 텔레비전 시대에 일종의 혁명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이 영역에서 유일한 혁명은 그 응답 가능성의 복원에 있다. 이 단순한 가능성은 대중 미디어가 지닌 현 구조 체제의 전복을 전제로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미디어 환경은 변하고 있다. 상호작용과 참여를 특징으로 하는 인터넷과 모바일 등 뉴미디어가 새로운 흐름의 원천으로 주목받고 있다. 온라인의 ‘집단 지성’이 P2P(개인간 파일공유)를 통해 재탄생시킨 ‘미드’(미국 드라마)와 ‘일드’(일본 드라마)는 ‘본방송’의 의미를 약화시키면서 텔레비전의 견고한 중앙집권적 매스커뮤니케이션망에 균열을 일으켰다. 촛불시위를 생중계한 웹 텔레비전은 즉각적인 피드백의 폭발력을 보여주면서 “응답의 불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저자는 “텔레비전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웹 기반 의사소통망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는 특별한 시기가 끝나면 텔레비전은 다시 개인들의 일상을 제압하는 막강한 능력을 보여준다”는 것. 텔레비전의 시대는 끝나지 않은 셈이다.

텔레비전 앞에 선 우리에게 강요된 선택지는 ‘닥치고 즐겨’와 ‘텔레비전을 버려’ 두 가지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둘 다 극단적이라는 점에선 매한가지다. 또 다른 선택지는 없을까. 저자는 “텔레비전을 끌 수 있는 능력을 연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텔레비전이 상업적이기 때문도, ‘바보상자’이기 때문도 아니다. 시청자가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한 매스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의 ‘오프’ 버튼을 누른다는 것은 결정권의 독점 구조가 만들어내는 텔레비전이라는 흐름에 ‘응답’하는 길을 찾는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응답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텔레비전이 더이상 ‘호명’의 도구로만 작용하지 않도록 개입해야 한다. 저자는 그것이 “일방통행적 의사소통 구조에 대항하는 대안적 의사소통 흐름을 창출하거나 발신 독점을 해체하는 시도로 구체화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1만2000원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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