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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지음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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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뜩이는 유머 속 날선 통찰…14년 만에 첫 시집 심보선

입력: 2008년 04월 21일 17:34:03 경향신문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 (후략)”








시인 심보선씨(38)의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의 표제작이다. 1994년 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은
당시 “현실을 면밀히 관찰하는 투시력, 그 현실 가운데를 스스로 지나가는 푹 젖은 체험, 그러면서도 거기에 이른바 시적 거리를
만들어 놓은 객관화의 힘, 번뜩이지 않으면서도 눅눅히 녹아 있는 달관의 표현력, 때로는 미소를 흐르게 하는 유머, 이 모든 것들이
별 것일 수 없는 현실의 일상의 한 모습을 훈훈한 시적공간으로 이끌어낸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가 14년 만에 첫 시집을 펴냈다. “진작에 냈어야 하는데 부끄럽습니다. 등단 후 98년에 유학을 갔다가 2006년에
귀국했어요.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다보니 문단과도 거리가 생겼죠. 너무 어린 나이에 등단해서 한동안 시인이 된다는 것, 시를 쓴다는
행위에 대한 고민에 압도됐던 것 같아요. 망설이고 의심하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첫 시집을 내는데) 남들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저한테는 유학시절이 꼭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문단과 거리를 두면서 글쓰기에 대해 모색한 시기였습니다.”



그간 써온 작품 중 선별해 약 60여편을 모은 이번 시집에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독창적
시선이 확인된다. 80년대 후반에 청년기를 보낸 시인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민주화의 성공과 좌절을 목격한 이후, 적잖은
상실감을 맛봤던 듯하다. 해서 이번 시집에는 슬픔과 이별, 폐허, 환멸, 미망, 전락 등의 시어가 자주 눈에 띈다.








14년 전 극복돼야 할 대상이라고 지목됐던 ‘장난스러운 치기’는 번뜩이는 유머로 치환됐다. 그 유머 속에 세계의 아이러니, 세계에
대한 날선 비판이 담겼다. 시인은 “내가 믿었던 혁명은 결코 오지 않으리 / 차라리 모호한 휴일의 일기예보를
믿겠네”(‘착각’)라고 말하는가 하면, 노선을 잃은 버스와 정치적 노선을 비교(‘미망 Bus’)한다.



“그 장난기가 아예 사라진 건 아닙니다. 저는 좋은 예술작품에는 언제나 농익은 유머가 녹아 있다고 생각해요. 웃음을 통해서 한번
더 생각하고 느끼게 되고, 숨은 양면이 드러난다고나 할까요? 물론 설익은 웃음은 피해야겠지만요.”



예술사회학과 문화연구 등을 공부한 시인은 귀국 후 아트센터 나비와 문지문화원 사이 등 일련의 실험성 짙은 공간에서 활동해왔다.
“대개의 사회학이 이 세계의 불확실성과 혼돈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는데 비해, 저는 의미의 세계나 불확실성, 상징의 세계 속에
만들어지는 사회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요. 사회학과 문학은 제가 이 시대를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인데, 서로 동전의
양면처럼 보완적인 측면이 있죠.”



결국 ‘슬픔이 없는 십오 초’가 보여주는 성취는, 시적 감수성과 사회학적 시선의 조화에서 비롯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엿보이는 유머와 통찰력은 독자를 설득하는 힘을 갖는다.



〈 윤민용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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